의령을 찾아서

최초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그의 흔적들~~

청담 일취월장 2011. 12. 3. 20:02

 

  최근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성이 재삼 강조되는 시점에서 지금으로 부터 459년 전 4월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난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초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

1592년4월13일 일본의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를 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이어진 조선군과의 혈전으로 인해 부산포 첨사 정발이 전사하였고 동래 부사 송상현의 장렬한 전사와 함께 동래성도 무너졌다.

 

 

왜적의 진군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전란초기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국왕이 국경선 지역까지 피난가는 치욕을 맛보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 반격의 물꼬를 틔우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지방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한 것인데.

의병은 자발적으로 봉기한 군사들로서 전직관료, 유생, 일반 백성, 노비, 승려까지 의병에 참여해  조선 최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중에서 곽재우는 가장 먼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었는데.

임진왜란 직후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난 상황은 '선조수정실록'의 자료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 중 

각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에 삼도의신하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병기와 군량을 독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으로 명망 있는 사람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어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인심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명망  사족들은  백성들이  주축이 된

의병들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에 났섰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곽 재우 장군이었는데.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당시 그의 휘하에 모인 군사가 1,000여명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평소에 그가 닦아 놓은 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남 의령 곽재우 생가

의령의 고목사 곽월의 아들인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의병운동을 하는 그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거나 도적 노릇을 한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곽재우 장군은  민첩한  첩보활동과 신출 귀몰한 게릴라전을 통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남강의 나루터 정암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의령,  삼가,  합천

등을 수복하였고 이어 현풍, 창녕, 영산의 왜군까지 섬멸하여 경상우도 지역을 평정하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전 재산을 털어 향전에 나선 곽재우 장군.

 

 

그는 위기의 시기에서 사회 지도층이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몸소 보여

주었다. 

최근 다시 회자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가  곽재우 장군에게 무척이나 어울려 보입니다.